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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저널

나의 며느라기 이야기 - 1 - 결혼 첫날밤 시어머님과 같이 보낸 썰

by 이티서 2020.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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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한지 이제 70일이 된 신혼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 혹시 지금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나는 내 약혼자의 부모님을 이미 만나 뵈었고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까? 

 

내 약혼자는 이런 사람이라고, 그래서 결혼을 하면 이렇게 해줄 거라고 혼자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나도 그랬다. 내가 1년을 넘게 만나면서 믿고 신뢰하고 무엇보다 나를 알아준다고 믿었던 사람. 나를 신경써주고 항상 궁금해 해주는 사람이라고 믿던 남자와 2020년 9월 결혼을 했다. 

 

지금까지 70일 남짓 나의 결혼 생활중 가장 특별했던 날은 역시나 첫날 밤이다. 왜냐하면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첫날 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혹시나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2020년의 이야기다  

 

결혼식도 안했고 신혼여행도 없었고 호텔에서 낭만적인 프로포즈도 없던 우리였다. 그렇게 대망의 신혼집 이삿날!  37살 막내아들이 혼자 이사를 할때 힘들것이 걱정되셨던 어머니 께서는 3시간 버스를 타시고 막내아들을 도와주러 올라오셨다.  그렇게 오신 시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신다는 말씀도 없이! 우리의 신혼집 첫날밤을 함께 보내셨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나는 신혼여행도 없이, 그렇게 결혼 첫날 밤을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둘째 아들과 같은 집에서 잤다. 

 

나는 문득! 결혼 전에 시어머니의 막내아들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일정에 대해서는 언제가고 언제오는지 따박따박 계획을 미리 알려주었던 나의 배려심있는 남자친구는, 무슨 영문인지 결혼 첫날 밤에 시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언제 가실지에대한 어떤 일정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나는 시어머니의 둘째 아들에게 맹렬하게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그런 거 물어보면 시어머니께서 상처받는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어머니 앞에서는 무기력한 사람이였다.  같이 사는 사람의 배려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당연히 참아야 하는 사람이였다. 

 

남친은 시어머니께서 이사를 많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주로 내 짐을 옮겨 준것은 시어머니의 아들이였다. 그마져도 시어머니 아들은 내 이삿날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내 짐을 옮겨 주었다. 시어머니는 내 옷가지를 걸 위치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낡은 옷장에 봉을 덧대서 사용하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봉이 무너졌으리라. 그렇게 짐정리를 하고 있던 나를 시어머니가 부르셨다. 그리고 부엌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시어머니는 본인이 사용하실 부엌처럼 배치를 이미 해놓으셨다. 내가 사용했던 그릇 받이는 창고 행이 됬다.  지금 부엌 구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본인이 가지고 온 각종 건강식품을 어떻게 조리해서 아들에게 먹여야 하는지에대한 브리핑이 계속 이어졌다. 같은 집에 있던 시어머니 아들은 자유롭게 본인 업무를 계속 이어갔다. 

 

  시어머니 아들의 자취방에서 가져온 라면을 보시고  이건 우리 아들에게 해먹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몹시 억울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무얼 먹이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당연하게 음식 노동의 의무를 진 사람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라면은 내가 가져온 라면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결혼 첫날 내내 내 머릿속에는 온통 왜?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무기력해졌다. 체념했다. 시어머니에게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다. 모든 저항의지와 궁금증을 머리에서 죽여버렸다. 나의 삶이 하루만에 뒤바뀐 것 같았다.  나의 배려심 넘치고, 나를 알아주던 세상의 단 한사람이였던 내 사랑은 갑자기 무기력한 막내 아들이 되었다. 그 집에서 아무도 내 기분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Do & Don't 딱지가 붙여졌다. 앞으로 그건 하지 마라, 앞으로 이건 이렇게 해라 라고 하셨다. 

 

 구남친과 작은 소리로 일상적인 대화를 해도, 시어머니는 들으실 수 있었고 참여해서 본인의 원칙을 말씀 하셨다. 14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원룸에서 자유로웠는데. 이 집에 내가 편안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방문을 닫고 들어가 있기에는 눈치가 보일것 같았다. 그렇게 부담감 없이 시어머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내 행동이 미래의 남편의 의식주와 연관지어 지지 않는 곳. 평가에서 자유로운 곳, 그것은 세탁실과 거실을 구분지어 주는 작은 벽이였다.  그렇게 세탁실 벽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직도 사진처럼 생생하게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어둡고 차가운 세탁실 바닥의 감촉.  지금 내가 이 공간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빌었던 것이..  

 

나는 나와 남편이 둘이 중심이 되는 결혼 첫날 밤을 상상했다. 그 누구의 방해나 개입도 받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짐을 배치하고 가구를 배치하는 그런 결혼 첫날을 떠올렸다. 이사로 힘들었을 서로를 위로하며 단둘이 오붓하게 저녁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앞으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 침대 새 이불에서 잠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현실은 시어머니가 차려주신 음식을 먹고 시어머니와 셋이 함께 산책을 나갔고. 시어머니와 남친이 나란히 걷고 나는 뒤에서 따라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갈아입을 속옷을 모두 챙겨서 씻으러 갔다.  김이 자욱한 욕실에서 속옷이 자꾸 말려 올라갔다. 그동안 혼자 살던 내가 김이 가득찬 화장실에서 속옷을 입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였다.  낯선 감촉이였다. 씻고 나오니 시어머니는 홀로 작은 방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문지방이 없어서 방음이 잘 안되는 집에서 나와 남친은 조용히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도망치듯이 출근을 했다. 회사를 다닌 다는것이 사무실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감사했다.

물론 코로나 여파로 재택근무가 권고되는 시기였지만 나는 도망쳐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객식구가 되버린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첫날 부터 남친의 가족이 불쑥 문을 박차고 내 생활에 들어오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 남친에게 내가 당연히 참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늘 나를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궁금해 할거라고 배려해 줄거라고 믿었던 내 착각이다.

 

결론적으로 어머니는 그날 집으로 가셨다. 시어머니 아들은 어머니가 가시는 모습이 짠하고 슬펐다고 한다. 금요일 오후 5시 집에서 지하철역으로 환승없이 30분이면 가는 버스터미널을 차로 1시간 30여분 걸려서 모셔다 드렸다고 했다. 

 

그 다음주 추석에는 시댁에 가서 제사를 지냇다. 내 생애 최초 제사 참여였다. 형수님은 사정이 있어서 오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입이 계속 말랐다 계속 물을 마셔대는 나에게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 물 먹을때 혼자만 물 먹지 말고 XX (남편)도 같이 물 챙겨 먹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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